우리는 종종 현재의 격렬한 미중 갈등을 특정 지도자의 성향이나 정치적 사건의 결과로 해석하곤 합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강경한 발언과 정책은 이 모든 갈등의 '시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바다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표면의 파도에만 주목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상은 한두 사람의 정치적 선택이 아닌, 거대한 '질서의 종말'에서 비롯된 숙명적인 충돌입니다. 트럼프라는 인물은 이 거대하게 흔들리는 질서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난 '독버섯'과 같은 현상일 뿐, 갈등의 뿌리가 아닙니다.

뉴 그레이트 게임과 '질서의 종말'

현재의 미중 패권 경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뉴 그레이트 게임'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벌였던 경쟁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뉴 그레이트 게임'은 그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그 본질은 '질서의 종말'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서'란 바로 냉전 체제를 의미합니다. 냉전은 인류에게 공포의 균형을 강요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매우 강력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거대한 '조폭'이 각자의 '나와바리'(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를 철저히 관리하는 '범죄의 질서'와 같았습니다. 두 진영은 공급망이 분리되어 있었고, 강력한 이념적 결속력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라는 거대 조직이 무너지자,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그 안에 숨어 있던 수많은 '자범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등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이 그 증거입니다.

남아있는 '조폭'인 미국 역시 예전 같지 않습니다.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세계 곳곳의 문제에 개입할 여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해체'이며, 우리는 평화가 아닌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위기는 안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트럼프 현상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의 위기, 막대한 국가 부채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플랫폼 경제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 왜 숙명인가?

이 흔들리는 세계의 중심에 바로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있습니다. 이 경쟁이 왜 일시적 현상이 아닌 숙명일까요? 역사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명확해집니다.

과거 미국에 도전했던 국가들의 경제력(GDP)을 미국 대비로 환산해 보면,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은 35%, 히틀러의 독일은 26%에 불과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3.5% 수준이었죠. 냉전 시기 소련의 GDP는 미국의 40.4%가 정점이었습니다. 심지어 1990년대 미국을 위협했던 일본의 경제력도 1995년 71%까지 도달했으나,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의 견제로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다릅니다. 2021년, 중국의 GDP는 미국 GDP의 76% 수준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도전자의 등장입니다.

미국 지도부는 이것이 숙명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모두 '중국 한 놈만 팬다'는 거대한 전략적 목표를 공유합니다. 시진핑 주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일본처럼 무너져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이 좌절되고 자신의 정권도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이든 대통령이 '화장한 얼굴'로 동맹을 규합하려 한다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민낯'으로 동맹에게 비용을 청구할 뿐입니다. 방식은 달라도 '중국 견제'라는 본질은 같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이미 함정 척수에서 미국을 앞섰습니다. 물론 미국의 핵 항공모함 11척이 버티고 있어 질적으로는 미국이 우위입니다. 하지만 세계 조선업의 55%를 장악한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해군력을 증강하는 반면, 미국은 조선업 생태계가 붕괴(세계 점유율 0.1%)되어 구축함 한 척 짓는 데 6~7년이 걸립니다. 중국이 최신 항모에 전자기식 캐터펄트 기술을 적용했다는 것은, 기술력마저 격차가 좁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냉전과 무엇이 다른가: '각자도생'의 세계

많은 이들이 현 상황을 '신냉전'이라 부르지만, 이는 현실을 오도하는 잘못된 규정입니다. 지금의 경쟁은 냉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공급망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냉전 시대처럼 두 개의 경제 블록으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둘째, 이념적 결속력이 없습니다. "공산당이 싫다"와 같은 명확한 이념적 세멘트가 사라진 시대에,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경쟁의 양상입니다. 냉전은 거대한 두 '블록'의 대결이었기에, 전면전은 곧 공멸을 의미했습니다. '공포의 균형'이 아이러니한 질서를 유지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의 '양자 대결'입니다. "저놈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쓰러진다"는 절박함이 지배하는 '인파이팅'에 가깝습니다.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하며 충돌 가능성도 높습니다.

결국 지금은 진영은 존재하되, 과거와 같은 강력한 결속력은 없는 '느슨한 진영' 속에서 철저히 **'각자도생'**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미국의 전략 변화와 한국의 지정학

세계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는 이 거대한 게임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를 내다봤습니다. 1960년대 에드윈 라이샤오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은 미국의 숙명적 적이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거점으로 삼고, 한국과 대만을 전기주(전초기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G2 중국을 만든 것은 미국 자신입니다. 미국은 1970년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았고(핑퐁 외교), 중국이 민주화될 것이라 착각하며 WTO 가입까지 도왔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값싼 물건을 소비하며 즐겼고, 그 사이 중국은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도광양해)는 전략에서 벗어나 '내가 질서를 만들겠다'(주동작기)며 '신형 대국 관계'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도 이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오바마의 '피벗 투 아시아'는 트럼프 시대에 인도를 끌어들인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Quad)'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바이든 정부는 '캠프 데이비드 선언' 등을 통해 한미일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미국의 국가방위전략서(NDS)는 이제 명확하게 중국을 '질서를 수정하려는 유일한 도전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북한이나 러시아는 부차적 위협입니다.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는 이유도, 다른 위협은 동맹이 알아서 막고, 미국은 모든 힘을 중국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입니다.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인식

이 거대한 지정학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은 산업적으로나 안보적으로나 정확히 그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냉전 해체 후 유럽이 '평화 배당금'에 취해 국방비를 줄일 때도, 우리는 1953년 이후 단 하루도 전쟁 준비를 쉬지 못했습니다. 최근 'K-방산'의 부상은 이러한 슬픈 현실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눈앞의 주가 변동이나 일상적인 뉴스에 매몰되어, 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보가 무너지면 경제는 사라집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일시적인 정치적 갈등이 아닙니다. 하나의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진통'의 시대입니다. 세계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각자도생의 논리는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이 '불안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닌,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현실 인식입니다.